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문단 편집) === 전쟁 중반(1920.04-1920.08) === 전쟁은 1920년 초 전면전으로 발전했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침공으로 인해 세력권이 폴란드 접경지대로 쪼그라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이 폴란드에게 동맹을 요청한 것이다. 우크라이나와 폴란드는 4월 21일 [[https://en.wikipedia.org/wiki/Treaty_of_Warsaw_(1920)|바르샤바 조약]]을 체결, 우크라이나는 폴란드의 동부 갈리치아 영유권을 인정하는 대신 폴란드로부터 우크라이나 유일의 합법정부로 인정받고 대소전쟁에서 폴란드의 군사지원을 받기로 했다. 폴란드-우크라이나 동맹은 5월 7일에 [[키이우|키예프]]를 해방시켰다. 자원과 인구가 풍부한 우크라이나의 분리독립을 결코 용인할 생각이 없었던 소비에트 러시아는 폴란드에 대한 반격을 결정, [[https://en.wikipedia.org/wiki/Sergey_Kamenev|세르게이 카메네프]]가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전쟁을 지휘했다. 남서부전선군을 지휘하던 [[알렉산드르 예고로프]]는 지원군을 받아 5월 28일 키예프로 기동했다. 제1기병군을 지휘하는 [[세묜 부됸니]]는 폴란드군의 방어선을 붕괴시키는 데 큰 활약을 했다. 키예프는 6월 10일 붉은 군대에 재점령되었다. 키예프 공세에 투입되었던 폴란드군 10만은 1만 5천이 전사하고 1만이 포로가 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나마 군대 자체가 붕괴되는 수준에 이르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반격은 성공적이어서, 6월 10일 키예프가 탈환되고 7월 11일과 14일 각각 민스크와 빌뉴스도 함락시켰다.[* 빌뉴스 함락 이틀 전에 [[리투아니아]]와 맺은 [[https://en.wikipedia.org/wiki/Soviet%E2%80%93Lithuanian_Peace_Treaty|강화조약]]에 따르면 소비에트 러시아는 빌뉴스를 리투아니아에게 넘겨주기로 되어 있었지만 무시하고 넘겨주지 않으려 했다. 심지어 8월에는 아예 리투아니아 정부마저 뒤엎어버리려 했지만, 바르샤바 전투에서 대패한 직후인 8월 26일 빌뉴스를 리투아니아에 반환한다.] 이 무렵 [[영국]]이 폴란드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개입하여 더 이상 진격하지 말라고 경고했으나 당 중앙위원회는 7월 16일 전쟁을 계속하기로 결정, 17일 영국 측에 모든 중재 시도를 거부하며, 오직 폴란드와 직접 협상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23일 정치국은 폴란드 출신의 율리안 마르흘레프스키(Julian Marchlewski)를 지도자로 삼은 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Polrewkom)를 수립했다. 이에 영국 정부는 새로운 국경선을 제안했는데 이것이 바로 당시 영국 외무장관 조지 너새니얼 커즌의 이름을 딴 [[커즌 라인]]이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초기에는 이 제안을 잠시 고려했으나 붉은 군대의 진격 속도가 상상을 초월하자 이를 무시하였고 [[블라디미르 레닌]]은 폴란드 침공을 주장했다. [[레프 트로츠키]]와 카를 라데크는 레닌의 이러한 주장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남서부 지역에서 크림 반도의 [[표트르 브란겔]]이 지휘하는 백군과 싸우던 [[이오시프 스탈린]]도 폴란드에 정신을 쏟는 사이에 백군이 회생할 가능성, 붉은 군대가 폴란드를 치기에는 너무 약하다는 점,[* 당장 보급과 정비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고 투입할 수 있는 병력도 전성기 러시아 제국이 오스트리아 전선에 100개 사단 이상을 투입할 수 있었던 반면에 소비에트 러시아는 폴란드로 35개 사단만 투입할 수 있었다.] 폴란드 노동계급의 강성한 민족주의를 경고했다. 하지만 레닌은 폴란드로 들어가면 모든 노동자들과 유럽의 좌파 정당이 혁명을 일으켜 소비에트 러시아를 맞이할 것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폴란드를 거쳐 독일까지 모두 적화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러시아 공산당]]은 폴란드를 넘어 독일까지 진출, 독일 공산당을 원조하여 정권을 장악하여 러시아-폴란드-독일을 아우르는 거대한 소비에트 공화국 연방을 만들자는 대소련 구상도 하였는데,[* 독일은 제 2제국 시절부터 사회주의 사상의 중심지였으며, 특히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전쟁 책임론과 사회적 혼란에 힘입어 극좌파의 봉기가 산발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것이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이 폴란드를 원조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군사 원조 자체는 폴란드 독립 직후부터 [[프랑스]]에 의해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래로 폴란드인들이 계속 복무해 왔던 인연으로 프랑스는 폴란드에 대하여 매우 우호적인 입장이었고, 그래서 1차 대전중 프랑스군에 복무한 폴란드인(약 20만 명에 달했다)들을 종전으로 남아도는 잉여 군수 물자와 군사 고문단과 함께 본국으로 돌려보내 신생 폴란드군을 구성할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당시 폴란드군의 사진이나 기록화를 보면 죄다 프랑스 군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훗날 불의 십자가단, 프랑스 사회당을 지도한 [[프랑수아 드 라 로크]]도 폴란드군 고문 출신.] 참고로 이 구상은 소비에트 군대가 폴란드 국경선을 넘기도 전부터 거론되던 것으로, 당시 레닌이[* 정작 레닌의 이러한 구상에 대해 다른 볼셰비키들은 회의적으로 보았고 특히 민족 문제에 정통한 스탈린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면서 설령 독일의 적화가 가능해도 독일과 러시아의 민족 문제 때문에 독일이나 폴란드가 연방에 가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하지만 소련은 독재국가가 되어있었고, 레닌의 고집을 막는 건 불가능했다..] 얼마나 낙관에 빠져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레닌, 트로츠키, [[미하일 투하쳅스키|투하쳅스키]]는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를 최우선 목표로 설정한 전략 계획을 승인했고 이에 붉은 군대는 폴란드-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어섰다. [[흐로드나|그로드노]]는 22일, [[비아위스토크]]는 28일, [[브레스트(벨라루스)|브레스트]]는 29일 함락되었다. 부크 강의 폴란드군 방어선도 일주일만에 무너졌다. 서부전선군은 8월 2일 나레프 강을 도하하여 바르샤바에서 97km 떨어진 곳까지 진격했다. 동시에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는 국경 분쟁을 겪고 있던 폴란드를 이 기회에 볼셰비키의 힘을 빌어 아예 멸망시키려고 했다. 독일은 [[단치히 자유시]]의 [[사보타주]]를 사주하여 폴란드의 물자반입을 거부했으며, 폴란드로 향하는 물자가 자국을 경유하는 것을 거부했다. 체코슬로바키아도 폴란드로 향하는 물자의 반입을 막아버렸다. 폴란드와 [[혈맹]]에 가깝던 [[헝가리 왕국(1920~1946)|헝가리]]는 3만의 기병군단을 폴란드에 파병하려 했지만 체코슬로바키아는 중립을 선언하면서 이동을 막았다. 한편 스탈린은 레닌의 의지가 확고하자 확전 반대파에서 찬성파로 돌아섰다. 5월 26일 남서부전선군에 배속된 스탈린은 7월 12일 레닌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받았다. >"스탈린에게 요청하는 바, 1) 공세를 강화하기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2) 내게 [[이오시프 스탈린|그]]의 의견을 전해주기 바랍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커즌 라인|영국의 중재]]는) [[크림 반도]]를 합병하겠다는 야심을 감춘 순전히 사기라고 생각합니다." 스탈린은 크게 고무되어 다음과 같이 답장했다. >"폴란드군은 완전히 궤멸되고 있으며, 폴란드는 통신과 행정이 마비되었고, 폴란드에서 내리는 명령은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보다 훨씬 자주 우리 수중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폴란드인들은 쉽게 회복되지 않을 붕괴를 겪고 있습니다." 계속된 승리에 고무된 볼셰비키는 커즌이 런던에서 평화협상을 열어 휴전을 맺자고 제의했을 때 이를 다시 무시했다. 스탈린은 영국의 제의를 비웃었다. >"나는 폴란드가 패배한 지금처럼 제국주의가 약했던 적이 없고 우리가 지금처럼 강했던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단호하게 대처하면 할수록 우리에게나 세계혁명에 모두 좋을 것입니다. 정치국의 결정을 알려주십시오." 하지만 폴란드에서의 전황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낙관과는 다르게 돌아갔다. 폴란드 침공에 반대하던 시절의 스탈린[* 1920년 1-2월 경]이 경고한 대로 폴란드로 진격할 때 보급 문제가 심각해지기 시작했고 민족주의로 똘똘 뭉친 폴란드 노동자와 농민들은 소비에트 러시아에 협조하기는커녕 소비에트를 침략자로 인식하여 맹렬히 저항했다. 그리고 투하쳅스키는 전선에서 한참 떨어진 민스크에서 지휘하느라 전선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낙관했으며 폴란드인들이 수도 방위를 위한 힘을 비축하기 전에 싸움을 끝내야 한다면서 신속한 바르샤바 점령에만 맹목적으로 집착하고 있었다. 한편 피우수트스키는 한때 키예프 점령을 통해 대부분의 폴란드 정치가들로부터 지도적 역할을 인정받았지만, 그 키예프에서 참패하고 전세가 크게 불리해지자 권력이 약화되었다. 피우수트스키의 정치적 동맹자였던 레오폴드 스쿨스키 내각은 키예프 함락 전날인 6월 9일 사퇴했고, 27일 민족민주주의 진영의 브와디스와프 그랍스키 내각이 구성되었다. 그러나 그랍스키 내각은 7월 24일 다시 빈첸티 비토스 내각으로 교체되었다. 비토스 내각은 소비에트 러시아로 사절단을 파견하여 평화협상을 시도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8월 10일 영국에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카메네프는 명목상 폴란드의 [[독립]]과 [[민족자결주의|민족자결]]을 보장하긴 했지만, 요구조건의 내용은 사실상 [[항복]] 내지는 폴란드의 [[무장해제]]에 가까운 것이었다.[* [[베르사유 조약#s-6|폴란드군의 병력을 5만으로 제한하고]], 군수산업을 해체하며, 이 병력을 무장시키는 데 필요한 무기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볼셰비키에게 양도하도록 했다. 또한 폴란드에 새로운 병력이나 무기 반입을 금지하고, 비아위스토크와 [[발트 해]]를 잇는 [[철도]]를 러시아가 교역 목적으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폴란드의 동부 국경은 당연히 커즌 라인에 맞게 조정되며, 폴란드군은 동부 국경으로부터 최소 50베르스타(약 53km) 떨어져야 했다. 무엇보다도 '민병대'를 조직하도록 했는데, 이는 폴란드 노동자들을 무장시켜서 붉은 군대에 호응하게 하겠다는 속셈이었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수상은 볼셰비키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였고, 영국 대사는 폴란드 정부에 내용을 전달했다. 14일 폴란드 사절단은 회담을 위해 투하쳅스키가 있는 민스크의 사령부를 방문했다. 사실상 멸망 직전에 몰린 폴란드였으나, 전황은 8월 12일부터 25일까지 계속된 [[바르샤바 전투(1920년)|바르샤바 전투]]를 기점으로 극적인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투하쳅스키가 이끄는 서부전선군은 폴란드군의 저항이 약한 바르샤바 북방에서 전선을 돌파, 서쪽으로 종심 깊게 돌진하여 바르샤바를 포위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것은 피우수트스키가 파놓은 함정이었다. 폴란드군은 의도적으로 바르샤바 북쪽에서 약하게 저항하여 투하쳅스키가 종심 깊은 공격을 실시하도록 유도한 뒤, 서부전선군의 허술한 남쪽 측면을 최정예 충격집단(Grupa Uderzeniowa)으로 들이받아 포위 격멸시키는 작전을 짰다. 붉은 군대는 그대로 함정에 빠져 300km에 달하는 남쪽 측면을 완전히 노출했다. 16일 피우수트스키가 직접 이끄는 2만여 충격집단이 측면을 파고들어 36시간만에 70km를 진격했다.[* 훗날 [[독일 국방군]]의 [[전격전]] 진격 속도가 이와 비슷하니 거의 무인지경을 내달렸다고 봐도 된다...] 뒤이어 거대한 재앙이 붉은 군대에 닥쳤다. 전선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서 상황을 빠르게 판단하지 못했던 투하쳅스키는 18일이 되어서야 전군에 퇴각 후 재집결하라는 명령을 하달했지만, 일선 부대에 명령이 너무 늦게 도착하거나 심지어 아예 전달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일부 부대는 폴란드군에 맞서 싸우다가 괴멸되었고, 다른 부대는 계속 서진하다가 퇴로마저 차단당했다. 서부전선군은 전투병력 14만 중 2만 5천이 전사하고, 6만 5천이 포로로 잡히는 대참패를 겪었다. 다른 3만여 명은 [[동프로이센]]으로 후퇴하여 그곳에서 억류되었다. 투하쳅스키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물러나야 했다. 후일 '[[비스와 강]]의 기적'이라고 불린 바르샤바 전투의 승리를 두고 프랑스 군사절단의 [[막심 베이강]]이 폴란드의 작전을 입안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특히 피우수트스키와 갈등을 빚던 민족민주주의 진영이 이런 주장을 했다.[* 심지어 '''[[성모 마리아]]께서 폴란드에게 기적을 안기셨다는(...)''' 주장마저 나왔다.] 그러나 베이강이 인정했듯이, 당시 바르샤바의 작전은 폴란드가 입안한 것이었고, 전투에 참전한 병력도 전부 폴란드 병사들이었다. 물론 이전에 프랑스에서 건너온 폴란드 자원병([[폴란드계 프랑스인]]들과 폴란드 출신 독일군 포로로 구성)과 각종 물자, 프랑스 장교들이 상당한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이 승리의 주연은 단연 폴란드와 폴란드의 독립 영웅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였다. [[파일:Battle_of_Warsaw_1920.jpg]] ▲ [[바르샤바]] 근방에서 [[폴란드군]]에게 노획된 [[붉은 군대]] 군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